산부인과와 홍삼 진액

산부인과와 홍삼 진액

나는 오늘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산부인과에 다녀오면 오묘한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홍삼 진액을 먹으려다가 8년 숙성된 진액이 손에 묻었는데 물티슈가 없을 때 같은, 그런 찐-득 찐-득한 기분. 대기실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해주는 남자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미혼인지 관계는 언제 했는지, 생리는 언제 끝났는지와 같은 사적인 질문 때문일까, 아니면 바쁜 일정 속에서 산부인과에 혼자 올 수밖에 없을 만큼 지금 내가 아프기 때문일까.

어찌됐든 나는 산부인과에 다녀온 날이면  ‘몇 달 전부터 왼쪽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건 단순히 배란통이었다고?!!-그러기엔 꽤 주기적으로 너무 아팠는데-’하는 놀람이 뒤섞인 안도감과 함께, 어쩐지 다 마시지 못한 홍삼 진액이 내 손바닥 어딘가에 끈끈하게 남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립스틱을 다시 바르며, 비장한 눈빛으로 스스로를 다독인다.

 

‘아니야, 잘 왔어. 어찌됐든 별 일 아니라잖아.
이제 아프면 참지 말고 산부인과에 무조건 바로 가자.
괜히 걱정만 하지 말고.’

 

#혼자 사는 여자는 건강이라도 잘 챙겨야지

혼자 사는 여자는 건강이라도 잘 챙겨야지,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 주문 같은 다짐을 굳게 하면서 나는 조금 전 작업실로 돌아와,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홍삼 진액을 타 먹은 것이다.-너무 써서 홍삼 진액의 두 배만큼 꿀을 넣어야 했지만-

그리고 때마침 이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여자로 태어났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신체적 고통을 생각해 본다.

  • 하던 날, 누군가가 알려줘서 내 바지가 빨갛게 물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자괴감이란. (다신 학원 안 갈 거야라고 다짐하면서 집에 와서 엉엉 울었었다.)
  • 하는 날이면 거의 기절하다시피 했던 짝궁을 보면서, 생리통이 성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론하곤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여중여고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생리증후군이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체험을 한다.)
  •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생리전증후군이 시작되어 떡볶이와 초콜릿을 있는 대로 먹으며, 히스테리하게 변한 나의 모습을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나 그날이야’라는 말로 그럴 듯하게 정당화한 뒤, ‘내가 너무 지나쳤나’ 하는 고민에 잠 못 이루던 날들. (친구들과의 수다를 통해 내린 결론은 ‘우린 모두 호르몬의 노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 생리통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 좀 나아지려는가 하던 차에,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구토 증상과 호흡 곤란으로 수업을 중단하고 대학 병원 응급실에 가야했던, 무려 작년의 기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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