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가는 날

 

하나, 둘, 셋…

 

스마트폰 달력을 헤던 엄지손가락이 8일에 멈췄다. 냐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연차휴가에 맞춰 벼르고 있던 하와이행 출국이 생리 예정일과 겹친 것이다.

 

 

출퇴근길에 위안 삼던 커피값, 피곤할 때 이용하던 택시비, 무엇보다 몇 달 치 수영 강습료까지 아끼며 준비한 여행이었다. 수영은 나에게 운동 이상이다. 3년 차인 내 의사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업무에 지칠 무렵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팔과 어깨를 둥글게 내젓고 다리를 위아래로 힘껏 차며 ‘음파-’ 숨을 내쉬어야 했다. 모든 움직임이 타이밍이 맞을 때 나는 물을 가르며 부드럽게 나아갔다. 심장이 뛰고, 온몸에 피가 돌았다. 회사가 아닌 물속에서, 나는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수영이 몸에 익자, 바다로 가고 싶었다. 6개월 할부로 하와이행 티켓을 샀다. 일주일만 있으면 출국인데, 하필 생리라니. 하와이에서 내내 생리대를 하고 다닐 생각을 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최유영 씨?” 노주형 과장의 한 마디에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을 퍼뜩 껐다. 대학 축구부 출신인 노주형은 과장보다는 주장에 가깝게 팀과 회의를 이끌었다. 동시에 명민하고 성심껏 부장의 의중을 파악했기에 부장도 그의 주도권을 마땅히 여겼다. “회의 시간에 집중 안 하고 뭐하는 겁니까.” 회의는 본론을 마치고 지난 회식 후일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머쓱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노주형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는 회식 때 나를 향했던 표정이 서려 있었다. 어리둥절한 듯 보이지만 경멸감을 애써 감춘 얼굴. 어찌할 바를 몰라 소주가 섞인 맥주를 허둥지둥 들이킨 그날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퇴근길에 피임약을 사러 약국으로 향했다. 생리 시작 전 10일이나 최소 7일 전부터 매일 같은 시간에 경구피임약을 복용하면 생리를 늦출 수 있다. 수영을 하기 위해 종종 이용하는 방법이다.

 

“피임약 주세요.”

 

   일 년에 두어 번은 하는 말인데 할 때마다 매번 같은 무게로 부담스러웠다. 약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버릇이다. “다음 주에 하와이 가는데 생리가 딱 겹치더라고요…” 묻지는 않았지만, 사실을 말하는 건데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왜 굳이 이런 말을…’ 상치 못하게 무안한 타이밍이 있다. 내 말과 행동이 상황 속에서 갑자기 부자연스러운 처지에 놓이는 순간. 그날도 그랬다. 노주형 과장에게 튀어나간 내 말들은, 한껏 처량해지고 말았다.

 

소맥을 12잔 정도 비운 노주형 과장은 꽤 억울해했다. “김 과장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힘들 때 어깨 두드려 준 거지, 엉덩이 아냐 아니고, 허벅지는 아주 살짝, 내가 직접 들었어. 그게,” 몇몇 사람들은 수긍했고 몇몇은 침묵했다. 나는 침묵했다. 회사에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 부서 사람들 일이고, 곧 있으면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갈 것이다. 굳이 내가 말을 보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목이 타고 입이 간지럽고 속이 뒤틀렸다. 몸이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공기가 일순간 무섭게 가라앉았다. “뭐?” 모두가 노주형의 시선과 같은 방향을 향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2차 가해가…” “최,유,영.씨. 뭐.라.고?” 그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성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게 무슨 주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노주형 과장의 표정과, 갈 곳 잃은 내 말과 내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보름달 빛이 바다 위에 잘게 부서졌다. 원근감을 가늠하기 어려워 낮보다 밤 바다가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와이에 도착하고 난 이후 종일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영은 물론, 서핑 클래스까지 등록했다. 수영장과 달리 바다는 녹록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다했으나 나아가다 넘어졌고 나아가다 파도에 부딪었다. 그래서, 나는 더 살아있는 것 같았다. 파도에 실린 달빛이 발끝에 닿았다 말았다 했다. 알람이 울렸다. 피임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크로스백에 넣어두었던 약을 꺼내 맨입에 삼켰다. 파도는 밀려가고 밀려왔다. 주기가 만들어졌다. 내 몸도, 자궁도 혈이 흐르고 쏟아지며 움직임을 만들었다. 시간의 움직임을 만드는 달이 하와이 바다 위에서, 환하게 기운차 보였다. 푸른 바람이 불었으나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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