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주춧돌과 지붕이 될 것입니다

 

저희 엄마에겐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많았고 형편이 어려웠으며 집안의 장녀였기 때문에 고등교육은 차마 꿈꾸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문지식이나 기술도 없어서 선택할 수 있는 직업도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업마저도 일정 나이가 되거나 결혼시기가 되면 그만두어야 하는 때였죠. 엄마가 갈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슬퍼서 딸에게는 절대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고 엄마가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원하는 만큼 책을 사주고 싶다고 슬픈 얼굴로 어린 제게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는 남자들이 사회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거머쥐는 기회들을 자신의 딸에게 쥐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딸을 잔인한 말로 몰아부쳐서라도 공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늘 상처되는 말만 하진 않았어요. 때로 지금까지 도움되는 말들은 전부 엄마가 마음에 새겨준 것들이었습니다. 대표로 발표하게 되거나 주인공을 맡거나 대회에 나가는 일 등등, 나서고 싶지만 주저할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줬습니다.

 

“시도해보기 전에 실패를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 실수든 실패든 다음 기회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 무엇이든 처음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잘 할 생각하지 말고 하면서 열심히 배워나가라. 큰 기회나 고대하던 제안이 왔을 때 망설이지 마라. 네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은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기 때문에 네게 온 것이다. 혹여 우연한 기회라 하더라도, 악착같이 거머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전해봐라. 그 경험은 경력으로 쌓일 것이다.”

 

엄마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어도 누구보다 제게 도움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여러 일들을 두려움 없이 벌이고 즐기게 되었으니까요. ‘해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원하는 목표마다 도전하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여자도 실수하고 실패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슬로건처럼 SNS에서 떠돌 때 ‘성공하지 않아도, 그럭저럭인 결과가 나와도,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여자에게 자신감을 키워갈 바탕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남성중심적인 사회는 여자의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긴 하지만 저희 고모는 그럴 때일 수록 뻔뻔하게 굴어야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철판을 깔아라. 왜? 실수 좀 할 수 있지. 다음에 잘하면 돼.”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에게 여유를 주고 주변에도 드러내야 아무렇지 않게 이번을 넘어가고 다음 기회가 또 다가온다고 말이죠. 저 역시 회사를 다닐 때 다른 사람에게 압도되지 않고 당당하게 의견을 내며 여러 일들을 주도할 수 있기까지 실수해도 당황하지 않는 연습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실수할 때마다 옆에서 괜찮다며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결된다고 다독여주던 여자 선배들이 있었기에 금방 일의 흐름을 파악하고 적응할 수 있기도 했어요. 새로운 여자 후배가 들어왔을 땐 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아 도왔습니다. 여성이 여성을 돕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소한 조언과 도움이 모여 여성들이 자신감을 쌓아갈 원동력이 될테니까요.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서로를 위해서, 실수와 실패할 기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디렉터, 팀장, 매니저 자리에 대한 야망을 겉으로 드러내고 자리를 쟁취해서 여성 직원들의 능력을 개발하고 그들이 도전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경쟁심과 야망을 마음에 심고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과 원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진출’에서 멈추지 않고 ‘장악’으로 이어지기까지, 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본 모든 세대의 여성들이 자기 자리에서 다른 여성을 위해 애쓰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와 싸워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 때 초등학교 1학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글자를 간신히 배운 세대의 여성들은 자기 딸들을 중학교까지만이라도 보내려 애썼고, 그 딸들은 자기 딸들이 최대한 많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커리어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 애썼으며, 그 다음 세대 여성들은 모든 세대 여성들과 더불어 사회의 성차별과 강간문화를 지적하고 소리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자들의 외침 덕에 꾸준히 변화했고 여성의 연대는 더욱 단단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다른 여성들을 위해 지붕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가 함께 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어라운드바디 웹진에서는 여성의 몸과, 몸을 둘러싼 세상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무해한 글로 세상의 자극을 덜어내고, 잠시나마 우리 모두의 심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분들의 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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